The Commission of HUNG SA DAHN of AMERICA (미주위원부)

[동맹독서] 제3장 스승 도산 (장리욱 저 “도산의 인격과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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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리욱은 도산이 일생을 교육자로써 삶을 살았다고 하였다. 모든 문제에 있어서
“교육적인 어프로치”를 했다고 하였다. (P. 43) 그러고 보니, 도산은 1899 년 21 살 때에
점진학교를, 1908 년 30 살에 대성학교를, 1924 년 46 살에 중국 남경에 동명학원을 세운
교육자 이었다. 모두 다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학교들이다.
도산은 “교육독립운동”과 “교육입국”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인재를 기르는 중에,
새로운 “교육사상과 철학”을 탄생시킨 것이다. 도산이 얼마나 교육을 중요시 했는가?
그래서, 도산 사상을 한마디로 “도산 교육사상” 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교육에 종사한 수 많은 도산의 제자들에 의해서 증명이 된다. 서울대학교의 기초를 쌓은
장리욱 총장, 바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책의 저자이고 도산의 수 제자이다. 백낙준
단우는 연세대의 총장으로써 오늘날의 연세대학교 기초를 쌓았고, 홍익인간의 개념을
도입한 흥사단 단우이다. 백낙준 총장이 1970 년대와 80 년대에 흥사단에 와서 강의를
할 적에, 직접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미 당시에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인상적이고, 좌중을 압도한 연설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오천석은 미 군정
시절에 교육의 책임자이었고, 교육부 장관으로 한국에서 “민주주의 교육”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다. 정일형 단우는 미 군정에서 많은 인재를 정부 곳곳에 심은 단우이다. 8 선
국회의원으로 지금까지도 가장 깨끗한 정치인으로 꼽힌다. 한국의 쟌 다크라고 불리는
김 마리아는 고문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도산의 독려로 미국에 공부하러 왔고 그 약한
몸으로 노동하여 콜럼비아 대학교까지 와서 공부하였다. 나중에는 원산의 마르다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송창근 단우는 한신대학교 설립자 중의 한 사람이고, 한경직,
김재준 목사 등과 같이, 한국 교회의 3 대 목사 중의 한 사람이다. 이렇게 해방후
교육계에 종사한 흥사단 단우들이 한도 끝도 없이 많다. 고려대학교를 세운 김성수도
도산과 교분이 두터웠다.
남강 이승훈은 도산의 연설 중에,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 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라는 도산의 말에 직격탄을 맞고
도산과 면회하여 도산의 애국충정과 독립운동 방략에 감동하여 즉각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자기 집의 쓸 기와를 오산학교에 가져간 일화가 유명하다. 두 영웅은
이렇게 만남으로 서로 믿고 의지하는 영원한 동지가 되었다. 도산-남강의 만남은
오산학교를 낳았고 오산학교는 유영모와 함석헌을 배출하여, 한민족의 “씨알 사상”을
잉태한 학교가 되었다. 한민족의 사상과 철학의 흐름에 있어서, 도산 – 남강 – 유영모 –
함석헌에 이르는 연결고리가, 민족적으로 위대한 사상과 철학이 태동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든 것이다. 오산학교와 마찬가지로, 평양의 대성학교를 본 받아 수많은 학교가
전국에 설립되었다.
장리욱은 도산의 교육관을 5 가지로 분류하여 고찰하였다; 1) 성장의 사회관, 2)
새로운 교육 목표, 3) 교육의 효용과 그 내용, 4) 교육기관, 5) 교육방법 등이다.
첫째로, 장리욱은 성장의 사회관에서 도산의 참된 모습을 교육자로 그렸다. “때와
처지에 따라서 그가 무슨 운동을 벌였거나 또 무슨 사업에 손을 댔다 할지라도 그는
내심에 있어서 언제나 늘 교육자였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애국운동도, 독립운동도,
산업운동도, 또 군사운동까지도 모두 다 한가지 자세에서부터 어프로치된 것이다. 즉,
가르치고 키우는 견지에서 다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가르치고 키운다는 것은...누구에게
대해서... 어떤 고자세를 뜻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P. 42-43) 장리욱은 계속한다. “한
사회의 진보와 성장은, 즉 그가(도산) 말한 힘(역학)은 그 사회의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모든 모순과 불합리성을 개선하고 제거함으로써만 이룩할 수 있거나 축적될 수 았다는
사회관이다. 이를테면 변증법적 사회관이다.” (P. 43)
칼 맑스는 사회변화의 과정을 계속적인 갈등과 모순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도산이 맑스같이 고도의 이론을 요구하는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식민제국 시대의
사회상에서 무수한 불합리를 발견하였고, 이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위한 노력을 부단히
한 것은 사실이다. 그 해결점의 중심을 교육에서 찾은 것이다. 교육이다! 도산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독립운동도 교육으로, 독립 후의 민족 전도번영의 기초도 교육에서 찾은
것이다. 이러한 일관된 자세를 도산은 견지하였고, 도산의 교육사상이 되었다.
2018 년 3 월 17 일

윤창희 씀

1 Comments
admin 2018.03.18 16:37  
거수!
3장을 공부하면서, 제가 여러분들께 한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을 아시는 분은 한번 기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장리욱이 제 3장에서 쓴 "스승 도산"은 중요한 chapter입니다. 교육독립운동으로 민족을 구하고 교육입국으로 민족의 장래를 설계할려던 도산입니다. 도산사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도산의 "교육사상" 입니다. 장리욱은 제 3장의 첫 소 제목을 "성장의 사회관"이라 하였는 데, 전문적인 용어인 것도 같고, 또 "사회적 변증법"을 이야기 하였는 데 저한테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 3 장은 여러번 나누어서 공부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각 지부 회장님들은, 가능한 흥사단의 동맹독서를 지부의 단우 동지들과 공유하여 주셔서, 전 단우들이 장리욱 단우의 책을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권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첨부 파일에 제가 공부한 내용이 있습니다.
윤창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