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독서] 제3장(3) 스승 도산
스승 도산의 깨달음과 민중체험
도산은 나라가 망해가는 비상하고 어려운 시기에 살면서 나이 스물의 젊은 나이에 민족의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워 일으키는 일에 앞장섰다. 도산은 쾌재정의 연설과 종로 만민공동회의 연설을 통해 민중(민족)과 하나로 되는 깊은 체험을 하였다. 이 때 도산은 가진 것 없고 이름 없는 새파란 젊은이였다. 높은 관리들과 민중들 앞에서 그는 오직 성심을 다해서 진실을 말하였다. 그가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와 학정 속에서 나라가 망해가고 있음을 거리낌 없이 떳떳하게 밝혔을 때 민중은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환호했고 높은 관리들도 함께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도산은 자신의 몸, 맘, 얼이 하나로 되고 민중(민족)과 온전히 하나로 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 민중과 하나로 되는 체험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높은 체험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하나님(진리) 체험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은 자신의 속의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몸, 맘, 얼이 하나로 통일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 자신의 진실한 실존적 체험이다. 둘째 인간은 자기 밖에서 이웃과 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이웃, 만물과 하나 됨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은 나와 이웃(만물)과의 신비한 일치의 체험이다. 천인합일, 신인합일, 범아일여, 물아일체로 포현되는데, 이러한 초시간적 초월적 신비체험은 개인의 주체가 전체(천, 신, 만물)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 셋째 인간은 역사와 사회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민중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민중체험은 내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실존체험과 이웃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신비 체험을 포함하는 체험이다. 이것은 역사와 사회의 구체적인 민중들과 하나로 되는 체험이니 가장 깊고 높고 큰 진리체험이다. 역사와 사회의 구체적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이 체험에서는 개인의 주체가 깨어 있으면서 고통 받고 억압받는 민중과 하나 됨으로써 참된 주체와 전체의 일치, 참된 사랑과 정의에 이른다.
도산의 위대한 점은 이런 깊고 큰 체험과 깨달음을 끝까지 이어가며 심화 발전시켰다는데 있다. 그의 민중체험은 인간과 역사와 세계(국가)를 깊이에서 전체로 높고 크게 볼 수 있게 했다. 그가 1906년 말에 미국에서 동지들과 함께 작성한 ‘대한신민회 취지서’는 이미 그의 사상과 정신, 경륜과 방책이 깊고 높고 크게 확립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미 사상과 정신, 경륜과 방책에서 거의 완벽한 준비를 해 가지고 1907년 초에 한국에 왔고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를 설립했다. 그가 한국에 돌아와서 수많은 강연을 했지만 모든 강연이 듣는 사람들의 몸과 맘을 사로잡고 그를 따르게 했던 것은 한민족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깊은 철학과 사상, 경륜과 방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산의 정신적 계보: 한국현대의 위대한 정신적 산맥
도산이 미국에서 돌아와 신민회를 조직하고 전국에서 연설을 할 때 나이가 30이었다. 그 때 남강 이승훈은 나이가 44세였고 이미 기업인으로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나이 10세 이전에 부모와 조부모까지 여의고 남의 집에서 방 심부름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학교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으나 스스로 자신을 닦아 일으킨 인물이었다. 남강은 1905년 청일전쟁으로 사업에 큰 손해를 보았고 나라가 기울어가는 것을 보면서 낙담하면서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1907년 7월 평양에서 도산의 강연을 들었다. 도산의 강연이 그에게 큰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그는 곧 머리를 깎고 술과 담배를 끊고 도산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남강의 교육정신과 철학은 기본적으로 도산에게서 배운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덕력과 체력과 지력을 길러서 건전한 인격을 이루고 건전한 인격을 이루는 사람들이 서로 믿고 돕는 단결을 이루는 것이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우는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라는 도산의 가르침은 남강이 세운 오산학교의 교육정신과 이념이 되었다. 그는 “몸을 깨끗이 하고 집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한 도산의 가르침을 그대로 평생 실천하였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집안과 마을을 쓸기 시작하였고 자신이 설립한 오산학교에서도 마당 쓸고 변소 청소하는 일을 자신이 맡아서 하였다. 오산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교사들이 존대 말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남강은 도산의 경륜과 인격을 우러러 보았고 도산은 남강의 강직함과 실천력을 높이 찬양하였다.”(김기석 ‘남강 이승훈’ 90쪽)
남강이 사상과 정신의 면에서 도산의 제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산이 망명한 후 남강은 신민회의 정신과 사업을 이어갔고 도산의 교육독립정신에 따라 오산학교 교육에 전념했으며 기독교인 민족대표들을 조직하고 끌어들임으로써 3·1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오산학교는 김소월, 백석, 이중섭, 한경직, 주기철, 함석헌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길러내었다. 만일 도산이 일제의 억압과 간섭 없이 대성학교 교육을 30~40년 이끌어갔다면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을까 생각하면 일제의 식민통치가 한민족에게 끼친 해악이 너무나 크다.
오산학교에서 유영모와 함석헌은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이들은 이승훈을 스승으로 높이 받들었다. 유영모는 도산이 추구했던 ‘나’(인격, 주체)와 민족 전체의 일치를 추구했던 철학자다. 그는 나의 깊이와 자유를 탐구하고 나의 깊이와 자유에서 전체(민족)의 하나 됨에 이르는 길을 열어갔던 구도자적 사상가였다. 유영모는 동서고금의 정신과 사상을 회통한 사상가로 높이 평가받는다. 함석헌은 도산과 남강의 교육운동과 정신을 이어받고 유영모의 철학을 물려받아서 민주정신과 철학을 씨알사상으로 확립하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함석헌은 늘 자신의 스승들로서 ‘도산, 남강, 고당’을 내세웠다. 그는 70년대 ‘씨알의 소리’를 내며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외롭고 힘들 때면 망우리 도산의 묘를 찾곤 했다. 도산의 묘 앞에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망우리(忘憂里)란 이름 그대로 근심과 걱정을 잊게 되었다고 한다. 함석헌이 보기에 도산은 민중 속에서 나서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을 위해 민중과 더불어 살았던 위대한 씨알이었다. 그래서 독재정권과 유착되었던 지식인 귀족들이 도산의 묘를 망우리에서 강남 청담동으로 옮겼을 때 함석헌은 민중에게서 민중의 선생님을 빼앗아 갔다고 몹시 노여워하고 서운해 하였다. 도산은 민주정신과 철학인 씨알사상을 심었고 남강은 그 뿌리를 내리게 했고 유영모는 그 뿌리가 하늘까지 닿게 했고 함석헌은 그 줄기와 가지가 뻗게 하였다.
스승 도산 안창호
도산은 결코 주입식으로 지식과 교훈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었고 명령과 훈계를 하는 권위주의 교사도 아니었다. 생명과 정신은 ‘스스로 하고 스스로 되는’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하는 인격을 가진 주체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하고 스스로 되는 이였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하고 스스로 되도록 일깨우고 이끌었던 참 스승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린 학생에게도 큰 절을 하면서 깨우치고 격려하였다. 스스로 하고 스스로 되는 삶의 모범을 보이고 사람들이 스스로 하고 스스로 되도록 깨우치고 이끌었던 도산은 인류의 참된 스승으로 모자람이 없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희생하고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지극정성을 다하면서도 삶의 기쁨과 사랑을 잃지 않았던 도산은 현대의 성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