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mmission of HUNG SA DAHN of AMERICA (미주위원부)

'뮤지컬 도산' 도산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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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 받을 때에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 (도산 안창호 어록–1907년. 신민회시절)
(뮤지컬 도산 표어 – 2019년 8월 10일)
 

2019년 8월 10일에 공연되는 “뮤지컬 도산”의 포스터에, 위의 도산의 어록이 실렸다. 위의 말씀은, 도산이 1907년도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가 신민회 등의 독립운동 사업을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평양 근처에서 하신 연설 중의 일부이다.
 

위의 말은 한국 민족의 정신 사상을 가르는 중요한 말이 되었는 데, 바로 이 말을 남강 이승훈이 들었다. 남강은 도산의 이 말에 직격탄을 맞았다. 남강은 즉석에서 도산과 면회를 신청하였고, 도산이라는 영웅과 남강이라는 영웅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때의 주된 대화는, “교육으로 인재를 키워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라는 교육독립운동 즉, 도산의 실력양성 사상이었다. 이 운명적인 만남은, 결론적으로 한국 민족이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씨알사상과 도산사상을 낳았다.
 

도산의 교육독립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남강은, 집에 돌아와 사흘 밤낮을 방바닥을 치면서 “어찌할꼬” 하고 울면서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였고, 집안 식구들도 “저 양반이 좀 돈 것 아니냐”라고 우려를 하였다고 한다. 남강은 결단의 사나이였다. 그는 즉각, 자기 집안을 위한 양반촌을 만드는 공사를 중단하고, 모든 자재와 재산을 들여서 학교를 세웠는 데, 이것이 바로 한국의 수많은 인재를 키워낸 오산학교이다. 도산이 직접 세운 대성학교와 더불어 남강이 세운 오산학교는 교육독립운동의 깃발이 가장 힘차게 날렸던 학교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한민족을 이끌고 갈 씨알사상이 잉태되었다.
 

남강과 도산의 교육독립운동은 함석헌 선생님의 수제자이고 한국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박재순 교수의 논문을 인용해 본다.
 

“한국근현대의 국민교육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안창호·이승훈이 일으킨 교육독립운동이었다. 민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키는 국민교육은 민의 주체적 자각을 위한 교육이다. 인간교육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교육하고 스스로 인간이 되는 교육이다. 그러므로 교육하는 사람은 섬기는 자세로 정성과 사랑을 다해서 교육하지 않으면 안된다. 깊은 신앙을 가졌던 안창호와 이승훈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 민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받들고 섬기면서 사랑과 정성을 다해서 가르치고 깨우쳤다. 사랑과 정성을 다해서 받들고 섬기는 자세로 민중을 가르치고 이끌었다는 점에서 안창호와 이승훈은 인간교육의 본보기이며 참된 스승이다. 안창호는 미국에서 한인노동자들을 교육하고 훈련할 때 먼저 길거리와 마당을 깨끗이 쓰는 것부터 시작했다. 허드렛일을 해주고 함께 노동하며 가르치고 일깨우는 모습을 보였다. 대성학교에서는 절대 정직과 진실을 내세우며 함께 뛰고 함께 일하며 학생들을 사랑으로 이끌었고 겸허하게 섬기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작은 일에서 큰일에 이르기까지 사랑과 정성을 다 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동포들 사이에서 서로 보호하고 협동하고 단합하는 모범을 보였다. 누가 병이 들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그는 혼신을 다해서 돌보고 도와주었다. 최남선, 이광수, 피천득, 이갑, 안태국, 윤현진 등은 병이 들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안창호의 헌신적인 간호와 정성스러운 돌봄을 받았다. 안창호의 간호와 돌봄을 받은 사람들은 안창호를 지극히 존경했고 안창호의 심복이 되었다.
 

남강 이승훈은 어린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학교 마당을 쓸고 변소 청소를 하는 등 궂고 험한 일은 자신이 맡아서 하였다. 이승훈은 자신의 재산을 다 바쳐서 학교를 세웠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면서 사랑과 정성으로 학생들을 깨우치고 이끌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살았으므로 언제나 죽을 각오를 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도 죽을 자리를 찾았다면서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그리고 3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감방의 변기통 청소를 하였다. 이승훈도 안창호와 마찬가지로 진실과 정직을 가장 앞세웠고 겸허하게 심부름꾼의 자세로 정성과 사랑을 다해서 일하고 가르쳤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육독립운동의 한 길을 걸어온 이승훈이 죽었을 때, 정인보는 묘비에 “다시 살고 다시 죽기를 거듭하였다(且生且死).”고 썼다.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이 오산중학교에서 한 학기 공부했는데 늙은 이승훈의 얼굴을 보고 “남자는 늙어서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로구나!” 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고 이승훈이 자신의 마음에 영원한 별이 되었다고 하였다.
 

일본 도쿄대학을 정년퇴임한 오가와 하루히사 교수는 근현대 한·중·일 정치 사상가들을 연구한 전문학자다. 그는 한·중·일 근현대 정치가와 사상가들 가운데 안창호와 이승훈처럼 사랑으로 겸허하게 사람을 교육하는 일에 헌신한 인물은 없다고 하였다. 안창호와 이승훈처럼 진실하고 정직하게 사랑과 정성으로 겸허하면서 높은 인격을 가지고 사람을 사람답게 기르는 일에 집중한 사람은 일본과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창호 이승훈의 교육독립운동은 한·중·일 근현대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특별한 일이다. 더 나아가서 세계근현대에서도 나라를 잃고 식민지가 된 민중을 깨워 일으켜 참 사람이 되게 하고,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에 이르려고 한 것은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박재순 교수는, 도산/남강의 교육독립운동이 한국근현대사 뿐만 아니라, 동양 근현대사와 세계 근현대사에서도 그 유례가 드문 놀라운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관찰하였다.
 

남강 이승훈이 세우고, 남강 이승훈의 교육독립운동 정신을 그대로 받은 오산학교는 그 뒤로, 고당 조만식의 손을 거치고, 순교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주기철 목사 등, 수많은 민족의 지도자들의 혼을 받아, 다석 유영모, 함석헌 등이 다듬고 다듬은 “씨알사상”을 잉태한 산실이 되었다. 위대한 “씨알사상”이 탄생한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1899년 경 평양에 점진학교를 세우는 일부터 시작하여, 1938년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수많은 조직과 사업을 창시하였으며, 그렇게 많은 단체를 시작하고 조직한 사람은 오직 도산 뿐이었다. 국가적인 조직인 신민회, 대한인국민회와 통합상해임시정부도 오직 도산이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오직 도산의 지극정성의 호소와 조직지도력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도산이 던진 말들과 도산의 행동들은, 하나의 큰 물줄기를 이루고 산맥을 이루어, “도산사상”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남강은 국내에서, 도산은 해외와 국내를 오가면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열매가 바로 “씨알사상”과 “도산사상”인 것이다. 한국민족은 절망하고 고통의 과정을 거쳤지만, 그 속에서 아름다운 사상을 낳았고, 희망의 새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100여 년이 지나고 나서, 2019년 8월 10일에 있을 “뮤지컬 도산”에서 가장 첫 말이, 남강의 가슴을 뚫은 도산의 위대한 말이 선택된 것이다. 나라가 없는 데, 어떻게 한 집안과 한 몸이 있겠느냐는 말에, 남강은 정신을 차려 집안 일을 때려 엎고, 바로 나라를 세우는 일에 착수하였다. 즉, 오산학교를 세운 것이다. 민족이 천대 받을 때에, 나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라는 말에, 남강은 자신을 가장 겸손한 자리에 놓아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도자의 위치에 올랐다. 오산학교에 높게 쌓인 똥을 치우는 변소 청소를 스스로 하여, 튀기는 똥물을 뒤집어 쓰기도 하였다. 이를 지켜 본 사람이 바로 함석헌이다.
 

함석헌이 누구인가? 그는 평생을 오직 진실, 정의, 지조, 의리, 줏대로 산 철학자이다. 그는 남강사상을 그대로 받은 사람이고, 그 사상을 다듬어 “씨알사상”을 세상에 내놓은 사람이다. 함석헌은 남강만 존경한 것이 아니라, 도산을 극히 사모하였다. 민족과 나라의 앞 날이 걱정될 때는, 망우리 도산의 묘지를 찾았다곤 한다. 도산의 묘지를 옮길려고 했을 때는, “도산 내 놓아라, 이 도적놈들아!”하고 외쳤다.
 

2019년 8월 10일의 “도산 뮤지컬”을 알리는 포스터에 실린 위의 도산의 말씀은, 수 많은 도산의 어록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되는 어록인 데, 이는 바로 남강의 가슴을 꿰뚫고 그로 인하여 오산학교가 설립되고, 그 학교에서 민족사에 빛나는 수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씨알사상이 잉태된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1935년 경, 도산이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하였을 적에, 평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도산은 제일 먼저, 앞서 간 평생 동지 남강의 묘소를 찾아 예를 갖추었고, 묘역 근처에 기념식수를 하였다고 한다. 남강과 도산의 동지애는 우리 후대들에게 가르치는 무언의 교훈이다. 흥사단 운동의 궁극적인 추진력은 무엇인가? 바로 도산이 보여주는 이 동지애이다.
사상이 왜 중요한가? 인간의 개인 생명은 유한하지만, 민족과 사상은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러가고, 세상은 회오리 바람처럼 요동치지만, 


사상은 민족과 함께 영원히 가는 것이기 때문에 “씨알사상”과 “도산사상”이 중요한 것이다. 한민족의 이 사상들은 세계에 내놓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생명사상이고, 평화사상이고, 사랑사상이다.
 

2019년 7월 1일
윤창희 흥사단 미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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