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mmission of HUNG SA DAHN of AMERICA (미주위원부)

[동맹독서] "도산을 따라서" (장리욱 저: 나의 회고록. P. 87-100)

admin 1 1717

도산을 따라서 (도산의 생활철학) - 장리욱 저 “나의 회고록”

이번에 도산을 공부하면서, 도산사상은 쉽게 명명하고, 또 여러 방면의 도산의 사상을

접할 수 있겠는 데, 계속 뇌리에 떠올리지만 확실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 도산의

실천정신, 행동하는 철학, 본보기, 모범 생활, 또 이상촌 현장을 찾는 도산의 끊임없는 실천 노력

등이었다. 학문의 세계에 있거나 공부를 하지 않은 도산은, 그 하나 하나의 말과 행동이, 그의

남긴 글과 1 세 단우들이 모은 자료들에게서 놀라운 사상과 철학으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책상머리에만 앉은 “샌님”이 아닌 도산은 문자나 이론으로 자기의 사상을 정리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을 하나씩 모아 보니, 이것이 모두 독창적인 한민족의 순수한 사상과 철학이 된 것이다.

특히 도산은 행동하는 사람으로, 5 대양 6 대주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특수한 면이 있다.

도산사상과 철학의 특성은, 그것이 어떤 말이나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행동을 요구하는 생활철학 혹은 행동철학인 것이다. 그런데, 장리욱의 회고록 중 “도산을

따라서”의 대목에서 그렇게 찾았던 단어를 발견한 것이다.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도산의 “생활철학”인 것이다. (p. 100) 도산의 생활철학은, “생각 즉 실천 및 행동”이라는 도산의

철학이다. 도산만큼 말과 행동이 일치한 사람이 있었을까? 도산이 한 약속은 천금만큼 무거운

것이어서,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독립운동가나 동지들, 미주와 멕시코에 있는 동포들에게도

확실히 인식이 되었다. 도산이 필요하다면, 그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내놓는 데 주저치 않았다.

멕시코의 동포들은 노예같은 애니깽 생활에서도 독립운동 자금으로 5 만불이라는 거액을

도산에게 내 놓았다. 도산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모든 사람에게 박힌 것이다.

장리욱 총장의 회고록 중, “도산을 따라서” (p. 87-100)는 도산의 인격과 생애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겠다. 도산이 평생 실천할려는 이상촌을 준비하는 과정도 잘 써있다. 가정에

대한 도산의 사랑도 잘 나타나 있다. 동지들과의 진지한 독립운동 방략에 대한 의견 교환은 말할

것도 없다. 장리욱 총장이 2 번째로 서무원으로 흥사단 살림을 맡은 기간이 14 개월이고, 기간이

1925 년 6 월에서 1926 년 8 월 정도일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26 년 8 월에, 뉴욕 콜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의 9 월 학기에 등록하기 위해, 뉴욕으로 출발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리욱의

나이로 보면, 29-30 살의 한참 때의 나이다. 도산은 이미 듀북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장리욱을

점 찍어, 흥사단을 지킬 단우 동지들 중의 유력한 단우로 선택한 것이 틀림없다. 이 때의 미국에

있는 동포사회는 2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는 데, 초기의 노동자 위주에서 1920 년대 중반은

소수이지만 유학생 그룹이 형성되고 있었다.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에는 미국의 역사를 바꾼 존 듀이 교수가 재직 중이어서, 교육으로

민족을 되찾을려는 학생들이 콜럼비아 대학교의 Teachers College 문을 두드렸다. 장리욱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장리욱은 시카고에서 도산에게 붙잡혀, 도산의 간곡한 부탁을 받는다,

“장군이 한번 더 수고를 해야 돼” 하면서, 흥사단의 서무원으로 일해 달라는 것이었다. (p. 90.

회고록) 도산의 말투로 보아 거의 명령조이다. 도산이 많이 생각하였을 것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사람에게 흥사단의 업무를 부탁하는 도산이나, 그것을 받아들인 청년

장리욱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에, 장리욱은 그의 생애에서 도산을 직접 모시고 살아 있는

“생활철학”을 배운 것이다. (p. 100)

존 듀이 교수가 누구인가? 그는 미국의 교육과 역사를 바꿀 정도의 인물로써, 그의

교육철학과 사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존 듀이는 사실 미국의 방향을 바꾸었다. 나라를

잃은 조선 청년들은 Columbia 대학으로 몰려 들었는 데, 흥사단 단우들도 많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였다. 해방 전에 1920 년도에 뉴욕에서 활동한 단우들은 도산을 포함하여 약 40 여명이다.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1) 도산 안창호 2)조병옥, 3) 장리욱 4) 최희송 5) 임초 6))

허진업 7) 김기후 8) 김창세 9) 이용설 10) 황인식 11) 김소연 12) 김여제 13) 김마리아 14)

한승인 15) 하문덕 16) 김병호 17) 김철원 18) 박리근 19) 윤성순 20) 황애덕 21) 이철원

22) 서은숙 23) 황창하 24) 박인덕 25) 김도연 26) 오천석 27) 백낙준 28) 이대위 29)

오정수 30) 정인과 31) 김려식 32) 최윤호 33) 송창근 34) 황희찬 35) 신현모 36) 천세헌

37) 곽림대 38) 변준호 39) 정일형 40) 황기환 (공립협회)

이들은 흥사단 1 세 단우들로써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참가하였으며, 특히 김마리아는 한국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고문으로 거의 죽게 되었으나, 영화의 한 장면같이 극적으로

한국을 탈출하여 고문당한 상한 몸으로 노동하여 고학으로 미국에서 학위를 마쳤다. 그녀가

콜럼비아 대학에서 공부를 한것은 물론이다. 그녀는 뉴욕한인교회에서, 삼일운동 동지인

황애덕을 만나자마자, “근화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기치를 다시 높이 들었다. 1 세 단우

임초는, 뉴욕에서 사업을 하면서, 흥사단의 많은 모임을 자신의 집에서 개최하여 흥사단 활동을

활발히 하였고, 헐벗은 동포들을 먹이고 용기를 주었다. 한국 교육의 주춧돌을 놓은 오천석,

백낙준, 정일형, 송창근 (한신대학교 설립자) 등도 모두 뉴욕 출신이다. 곽림대가 누구인가? 그는

흥사단 이사장을 지내고,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친 1 세 단우이다. 황기환 애국지사는 공립회원

회원으로 유럽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펼친 인물이다. 황지사는 총각으로 지내다가, 미국

뉴욕에서 서거하셨다. 뉴욕 출신 흥사단 1 세 단우들의 맹렬한 독립운동 활동은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많다. 모두 도산이 키운 제자들이다.


도산이 1911 년에 뉴욕 항구에 들어오고, 1925 년도 경에, 뉴욕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방략에 대하여 여러 지도자들 및 유학생등과 토론하였다고 하나, 현재 1925 년도의 활동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장리욱의 증언은 “도산은 먼저 뉴요크 방면으로 직행했다. 거기서 설산 장덕수를

비롯해서 윤홍섭 (조선문화회 초대 회장), 김도연 등 여러인사들과 독립운동에 대하여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p. 90) 시카고 지역에서 도산은 또 많은 유학생,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Northwestern University 에서 강의를 통하여 인재 구하는 작업을 지속하였다. 정한경 박사와의

대화는 시카고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p. 91-92)

1925 년도에 시작한 도산의 미국 여행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1913 년도부터

1924 년도까지는 흥사단 단우의 주축은 서부지역 출신이었다. 이들은 노동을 하였고, 흥사단을

창단하였고, 국민회와 더불어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25 년도의 도산의 미국 동부지역

여행은, 공부를 하는 유학생들과 독립운동 지도자들과의 대화 뿐만 아니라, 흥사단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단우들을 모집하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서부 지역 단우들은 해방후에도 미국에

남아 있었던 경우가 많았지만, 동부/중부 지역에서 공부를 한 젊은 단우들은 해방후, 미군정

시대부터 한국으로 귀국하여 건국에 이바지를 하고, 흥사단 한국 본부 건설에 크게 이바지 한

단우들이다. 이들은 미국에서부터 호흡을 맞추었으며, 미 군정시대에는 요직에 앉아서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단우들이 되었다.

“회고록”에서도 도산사상의 중심인 “힘” 사상이 강조되었다. 도산은 서슴없이 말하였다.

“지식과 기술을 열심히 배우고 쌓으라고 간절히 당부했다.” (p. 97) 도산은 또, “...노동을 하거나

사업에 종사하는 동포들을 만나면 경제력을 기를 것을 당부했다.” (p. 97) 지식의 힘을 기르고

경제적 힘을 기르자는, 도산의 “힘” 사상이다. 미국에 있던 동포들에 대한 도산의 호소이었다.

힘을 기르자! 그렇다 힘이다! 이 “힘”의 사상이 도산의 전 생애에 걸쳐서 나타나는 사상이다.

건전인격도, 한 개인으로써 힘을 기르자는 사상이고, 신성단결도, 단체로써 힘을 기르자는

사상이다. 지식과 경제력을 기르는 것도 힘의 사상이다. 장리욱은 이렇게 그의 회고록에서 도산의

사상을 기록해 놓았다.

2018 년 5 월 25 일

윤창희 씀

1 Comments
admin 2018.05.27 04:28  
거수!

장리욱 총장님이 쓰신 회고록 중, "도산을 따라서"를 지난 번에 보내 드렸습니다. 이것을 이번에 공부하였습니다. 장리욱 총장님이 도산의 수제자인 것은 아무도 부인 못합니다. "도산을 따라서"에서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사의 기록도 볼 수 있습니다.

윤창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