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성노예 운동의 시작 - 1991년 8월 14일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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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5 04:14
거수!
단우 동지들께서는한일 양국 민족 간의 중대 외교 현안인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흥사단 미주위원부가 2017년 4월 4일 부터 4월 18일까지 12번의 역사교실을 열어서, 이 문제에 대한 공부를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한 미주위원부는 2017년 4월 27일에, 뉴욕 지부 맨해탄 단소에서, 장철우 전 위원장님, 정광재 지부장님등 여러 단우들과,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문제에 대한 결의문"을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였습니다. 그 뒤로, 한국의 새 정부는 "한일간 위안부 합의문"을 파기한 바 있습니다. 흥사단이 역사교실로 공부한 것이 헛되지 않고, 역사의 현장에 참여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역사교실로 공부하는 동안에, 흥사단은 김민선 뉴욕 한인회장에게 위안부 문제를 중요한 인권침해로, 소녀상을 한인회관 이민사 박물관 안에 설치하는 것은 건의하였습니다. 김민선 회장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소녀상 설치에 대해서, 김민선 회장의 결단은 역사적인 판단으로, 크게 주목을 해야합니다. 흥사단은 뉴욕한인회와 긴밀히 협조하였습니다. 설치에 대한 결단 뿐만 아니라, 김민선 회장은 뉴욕 동포사회에서 활발한 기금 모집을 하여, 마침내 소녀상을 뉴욕 한인회관의 이민사 박물관에 영구 설치하였고,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소녀상을 공원같은 밖에 설치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뉴욕한인회관의 이민사 박물관안에 설치한 것은,
희생당하신 할머님들의 품격을 갖추고,
산 역사를 증언하는 의미, 항상 방문객을 맞이할 수 있는 장점들이 있습니다.
뉴욕 한인회 김민선 회장은 미 영방의원들과 접촉하여, 금번 2018년 6월 7일에, 뉴욕의 소녀상을 미 의회에서 초청하는 방식으로 미 연방의회에서 전시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는, 일본 정부의 필사적인 방해 공작에도 성취한 쾌거입니다. 흥사단 미주위원부에서는 이번 미 합중국 연방의회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번 행사는 미 연방하원의원 6분이 sponsor룰 하였습니다. 현재 11명이 신청을 하였습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미리 알려 주시기 바라고, 정장을 하여야 하며, 미리 예약을 해야 합니다. 뉴욕과 뉴저지 주에서는 버스를 한인회에서 제공합니다. Washington, DC는 황제인 단우님 (703-919-8785)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타 다른 분들은 저한테 (917-280-3255)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일 날, 운전 면허증 같은 ID가 필요합니다.
그동안 수고하신 뉴욕 한인회 김민선 회장님께 심심한 감사를 올립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첨부 파일에 미 연방의회 초청장이 있습니다. 또한 2017년 4월 4일에 실시한 역사교실 첫번째가, 아래에 있습니다.
윤창희 올림
Date: 2017-04-04
Subject: 1) 일본군 성노예 운동의 시작 - 1991년 8월 14일
Subject: 1) 일본군 성노예 운동의 시작 - 1991년 8월 14일
거수!
흥사단 미주 위원부가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운동을 결정한 후에, 본 위원장은 여러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차분히 하나씩 준비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성노예 문제는 "제 2의 독립운동"이다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싶을 정도로 심각한 사태라고 봅니다. 단우 여러분들과 의견을 나누고, 준비와 공부도 같이 할 수 있도록, 이번 Email부터는 번호를 붙여 보겠습니다. 반 인륜적인 인권 위반, 여성 성차별과 노예 제도가 합해진 이 문제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였고, 또한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할려는 음모와 노력을 치밀하고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일종의 마피아와 같은 조직 범죄 행위입니다. 20 만 명의 피해자의 80%가 거의 한국 소녀이며, 심지어는 12살 어린아이까지 있습니다. 한국 소녀들은 아시아 태평양 전 지역의 일본군이 세우고 운영한 위안소에 끌려 갔으며, 그 먼 곳에서 대부분 잔인하고도 서럽게 일본군들에게 학살되었거나, 버러져 죽었습니다. 1990년 대에, 생존자가 남북한 합쳐서 약 600명 정도만 있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면, 약 15-20만 명이 이 지구상에서 학살되어 감쪽같이 사라진 사건입니다. 왜 그토록 무리수를 두면서, 감추고 싶고 왜곡하고 싶은지, 그 의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소문으로만 들리던 한민족의 서럽고 서러운 성노예 역사가 세상에 밝혀진 것은 1991년 8월 14일,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세상에 터뜨리고 난 이후입니다. 그러니까, 1991년도가 성노예 운동이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1945년도의 해방과 1965년도의 한일협정이 체결되고도 한참의 세월이 흐른 다음입니다. 첫번째로, 김학순 할머니가, 한국민족에게 던지는 마지막 증언을 보내드립니다.
윤창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