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mmission of HUNG SA DAHN of AMERICA (미주위원부)

[동맹독서] 제9장: 13장(장리욱 저, 도산의 인격과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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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장 – 13 장 (현실에서 실천된 도산공화국과 이상촌)
장리욱의 제 9 장은 자상하지만 대범한 도산을 그렸다. 10 장은 도산이 평생 추구한
이상촌을 그렸다. 도산의 이상촌은 도산의 평생 꿈이었다. 도산이 생각하는 이상촌은, 독립운동
시절부터 구체적인 설계가 도산의 머리 속에 있었다. 호수, 시설, 공동체에 대한 계획이 있었고,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자급자족의 계획까지 담아 있었다. 도산은 생애 마지막까지,
이상촌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이상촌은 평화와 협동이 있는 Dream Village 이었다. 살아서
도산이 있었던 곳은 바로 이상촌의 축소판이었다. 리버사이드 최초의 파차파 캠프는 “도산
공화국”이었고,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의 중심지가 되었다. 바로 작은 이상촌이 실현되었다.
공립협회는 당시에 10 여개의 지부를 갖고 약 800 여명의 회원들 둘만큼 세가 확장되었다.
공립협회가 바로 “도산공화국”이 된 것이다. 도산이 가는 곳마다, 세운 조직마다, 모두 평화.화해.
단결이 넘치는 작은 “이상촌”이 되었다. 도산은 살아 있을 때, 이상촌을 실천하였고 더 나은
이상촌을 구상하였다. 도산은 한번도 본인 입으로 도산공화국 혹은 이상촌이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조직한 단체나 그가 머문 장소가 모두 그렇게 되었다. 놀라운 도산의 조직력이다.
흥사단이란 단체를 만들고 운영하는 방법 속에, 도산은 “정의돈수”라는 특수한 방법을 택했다.
“희락회”라는 순서를 모든 행사에 넣어서, 반드시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참석자들이 갖도록
하였다. 도산의 놀라운 발상이다. 도산이 천재적인 조직가인 것은, 그가 만든 모든 조직에서
사랑과 화해, 단결을 추구한 점이다. 공립협회, 청년학우회, 신민회, 국민회, 흥사단, 상해임시정부
등 수 많은 조직에서, 도산이 있는 곳은 “정과 의리”가 넘쳐 흘렀다. 도산이 있었던 장소는, 모두가
협동, 베품, 사랑이 있었다. 노동을 했던 파차파 캠프, 멕시코의 애니깽 농장, 한국, 상해, 러시아,
미국을 막론하고 도산이 있었던 곳은 모두 “도산공화국”이 되었고, 이상촌을 실현한 장소가
되었다. 도산이 그톡록 애착을 가졌던 이상촌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다.
11 장은 도산의 말과 글로써 도산의 웅변과 연설, 대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장리욱은
도산이 지극 정성으로 전하는 말들을 “혀가 닳도록 한 말”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또한 “도산은
1913 년 흥사단을 창립한 이후 통상단우의 수가 ... 120-130 명 정도에 이르기까지 ... 입단
절차에 관한 일을 도맡아 했다.”라고 했다. 이 120-130 명의 정예 단우들은 모두 도산이 손수
선택하고 훈련한 단우들이었다. 추정 이갑이 도산의 평생 독립운동의 동지이었고 독립운동의
거물이었지만, “추정은 안돼”라고 흥사단의 전신인 청년학우회의 회원 시험에 낙방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추정은, 흥사단 단우는 아니었지만 도산의 둘도 없는 동지이었다. 추정이
반신불수의 병에 걸렸을 때, 1000 불 (일부 기록에는 500 불)이라는 큰 돈을 시베리아로 보냈을
뿐만 아니라, 신한민보의 주필로 그를 미국으로 초청하였다. 병을 치료하게 하기 위해, 뉴욕의
Ellis Isaland 로 오게한 것도 도산이었다. 그 추정의 입국 서류를 흥사단 미주위원부의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전체 기록을 발견하여 Jennifer Jang 단우와 함께 최대한 자세히 해석하여
옮긴바 있다. 이러한 거물급의 추정도 탈락시킬 정도로 단우의 자격을 도산은 엄격히 심사하고
적용하였다. 도산의 훈육을 직접 받은 120-130 여명의 1 세 단우들은, 거의 전부 건국지도자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흥사단 단우가 된다는 것은, 나라 일을 할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흥사단의 뿌리와 씨앗이 된 것이다.
장리욱은 도산의 대화, 웅변, 연설에서, 도산의 지극정성의 노력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그 첫째는 준비다. 둘째로 도산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셋째로 도산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조용히 주의해서 경청하는 인내력과 아량을 가졌다. 넷째로, 도산의 말은 극히 평범하고 독창적이었다. (P.
163-166) 이 4 가지 대화의 덕목은, 도산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남녀노소 모두, 도산에게는
친구이고 동지이고 혈육과 같았다. 민족 일에 있어서, 도산에게는 남남이 없었다. 오랫동안 도산의 집은
바로 흥사단 단소이고, 자신의 집이었다. 지도자가 자신의 가정을 공개한다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로써,
도산의 그 위대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가정이면서 흥사단 단소인 장소에서 수많은 대화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도 도산공화국 이고 이상촌이었다. 장리욱 총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예를 들었다. “... 그 1)
애국심과 2) 영도력과, 3) 융화성을 각별히 찬양했다. 도산이 가는 곳이라면 언제라도 인화가 이루어지고 또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p 179) 우리는 작은 도산이 되기를 희망하고, 또 도산같은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니, 도산같은 인물을 키우자!
장리욱은 12 장과 13 장을, 도산의 말년의 일과 망우리의 도산이라고 소제목을 붙여서
도산의 마지막을 그렸다. 송태산장은(서벽사), 도산이 손수 지은 집이다. 이 작은 집 건축에서
도산은 하나하나 참견을 하였고, 민족 일을 하는 것처럼 정성을 기울였다. 도대체 도산이라는
사람은 어디 한군데를 버릴 것이 없다. 이 송태산장의 예가 바로 제자들과 우리 민족에게 주는
교훈이다. 장리욱의 표현대로, “현실을 사랑하고 아꼈는가 하면, 또 이상을 잃거나 잊은 것이
아니다.” (p. 169) 도산처럼 현실과 이상을 잘 조화한 사람이 있는가? “생각 즉 행동”의 원칙을
도산처럼 잘 지킨 사람이 없다.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시에, 어린 학생에게 약속을
지키느라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 바로 도산의 인격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그 철석같은
약속을 지키는 도산, 틀림없는 사람 도산에게, 당시의 모든 독립운동 자금이 몰린 것이다.
상해에서 도산의 비서를 지낸 구익균 단우는, 도산은 독립운동의 “돈 주머니”이었다고
증언하였다. 독립운동 자금을 도산이 관리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2018 년 5 월 18 일, 윤창희 씀

1 Comments
admin 2018.05.22 06:10  
거수!

15번째 동맹독서 시간입니다. 9장부터 13장까지 공부하였습니다.

도산은 평생을 이상촌 실현에 온 정성을 쏟았습니다. 아마 미국에서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면, 커다란 동포사회 중심의 이상촌이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환경과 조건이 허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산은 편안한 삶을 저버리고, 민족을 위한 거친 광야의 생활과 희생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도산은 성자의 삶을 살고, 민족의 제일 큰 자리인 "스승"이 되셨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마지막 장, 14장을 공부하겠습니다.

운창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