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독서] 제3장(5) 교육 방법 - 스승 도산-장리욱 저 "도산의 인격과 생애"
장리욱은 도산이 구사했던 교육방법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1) 동맹수련, 2)
대화, 3) 웅변, 4) 생활태도 (본보기) 이다.
첫째로, 도산은 동맹수련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우리가 서로 약속
하고 같은 목적을 갖고 동맹하자는 특수한 방법으로 수도원에서나 있을 법한 방법
이었다. 민족을 위한 일인 데, 한번 심각하게 해보자는 것이다. 옆에 있는 동지들과 같이
하는 동맹수련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도산이 정좌하여 동지들과 같이 단전 호흡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둘째로, 도산은 대화를 통한 교육방법을 택했다. 도산은 동지들과 대화를 하고,
식사를 한 것을 가장 즐거운 시간이라고 하였다. 제자들과 동지들은 이러한 대화를 통해
도산으로 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도산이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했을 것이다. 장리욱
은 도산과 같이 여행하는 시간이 많았는 데, 이 과정에서 도산의 훈육과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질문의 방식을 택하여, 서로 이해할 때까지 대화한 방법이다.
만약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우기거나 강압적이라면, 대화는 일찍 끊어졌을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를 세웠을 적에, 수 많은 독립운동 지사들과의 대화는 특별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념과 주장이 달랐을 그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연합정부와 같은 임시정부를
만든 것이다. 상해임시정부는 도산이 아니었으면 탄생이 불가능하였다.
셋째로, 장리욱은 도산의 웅변을 이야기하였다. 도산은 진짜로 연설을 잘한 것
같다. 도산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도산의 연설을 이야기할 정도이니 말이다. 김동인
소설가도 도산의 웅변을 기록하였다. 도산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이었을까? 도산을
연구하는 학자나 혹은 흥사단 단우라면, 모두 한번쯤은 물어불만한 질문일 것이다.
도산이 실제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건이, 1897 년 7 월 25 일
(음력) 고종의 탄신일이었다. 도산이 19 살이었다. 독립협회 관서지부 주최로 평양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장소이었는 데, 한석진 목사가 독립협회 관서지부
책임자이었다. 한석진 목사는 한국신학과 민족신학을 창립하려 했던 분이다. 도산의
쾌재정 연설을 주선하고,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도 그의 영향이 컸다.
그는 송창근 (단우), 김재준 목사가 조선신학교를 (현 한신대학교) 창설하였다고 할 때,
병상에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한민족의 정신을 그래도 살리고 있는 한신대학교를
주목할 필요가 있고, 송창근 단우의 삶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본 위원장은 지난 2012 년 6 월 16 일, LA 에서 열렸던 제 99 차 미주 단대회에
참석하여, 당시 LA 지부장이었던 이장훈 군의 즉석 지명으로 도산의 막내 아들인 안필영
군 (Ralph Ahn -단우)의 영어 연설을 약 20 여분간 통역할 기회를 가졌다. 당시에 안필영
군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2012 년도는 안필영 군이 85 세이었는 데도, 그의
목소리가 행사장을 압도하는 큰 목소리이었고 우렁찼다. 지금도 그 때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도산의 자세가 늠름하다고 했는 데, 안필영 군도 보면 키가 작은 키가
아니다. 실제로 도산의 키를 사진 속에서 다른 사람들하고 비교하여 보면 조금 큰 키로
중간 이상이지, 도산의 키가 절대로 작은 키가 아니다. 목소리와 키가 아버지로 부터
받은 유전이라고 치면, 도산의 목소리와 늠름한 자세를 안필영 군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안필영 군의 목소리는 미주 흥사단 website 인 www.ykausa.org 에서 찾을 수
있다. 안필영 군의 목소리에서 도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큰 아들 필립 안이
영화 배우로 나선 것도,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전인자가 있어 외모, 풍채, 목소리에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넷째로, 장리욱은 도산의 효과적인 교육 방법으로 그의 생활 그 자체를 꼽았다.
장리욱의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도산이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는 점...이것은 다름 아닌
그의 생활 그 자체다.” (P. 55) 도산의 본보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의 교육의 방법이
된 것이다. 박재순 교수의 말대도 한민족의 성현이 바로 도산인 것이다. 도산은 성자
처럼 살다가 성자처럼 아름다운 인생을 남겼다. 한민족의 성자가 탄생한 것이다.
위에 언급한 교육 방법외에도, 도산에게는 한민족에 전해야 할 절실한 메시지가
있었고, 그것을 가장 설명하고 전달한 사람이 도산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전달을
도산은 ‘언제나 정열과 성의’로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도산은 용광로, 열정(passion),
그 자체였다. 도산은 passion 을 가진 사나이었다. 그 열정(passion)을 불탠 사나이가
바로 도산이다. 그 열정(passion)을 사자후같은 웅변을 통해서, 모든 정성을 다 했을
때의 단상에 서 있는 도산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2018 년 4 월 4 일, 윤창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