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mmission of HUNG SA DAHN of AMERICA (미주위원부)

[동맹독서] 도산 안창호 - 남강 이승훈

admin 1 2609

도산 안창호 - 남강 이승훈 – 오산학교 – 씨알사상

도산사상과 씨알사상을 더듬어 올라가 보니, 남강 이승훈이라는 거인이 서있다.
남강 이승훈! 그는 오산학교를 세웠고, 오산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씨알사상이 있
었고, 도산사상의 근원을 찾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남강은 한민족의 영웅이다.
도산사상을 본인도 모르게 가장 충실하게 실천한 사람이 바로 남강일 것이다.

1. 운명적인 만남

1907년 7월 경에, 남강은 평양에서 도산의 애국 연설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나
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
을 누릴 수 없다”라는 도산의 말에 남강은 직격탄을 맞았다. 남강은 도산의 “교
육으로 백성을 일깨우지 않으면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없다”라는 교육진흥론/실
력양성론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 교육이 아니면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없구나! 연설이 끝난 후, 남강은 즉시 도산과의 면회를 신청하여 도산을 만나
그의 진실된 애국충정과 독립운동 방법론에 감동되고 만다. 남강은 도산이 설파
한 교육/실력양성에 대한 가치와 진실을 깨달았다. 도산의 제자가 된 것이다.

남강은 도산의 교육독립운동 전략에 따라 오산학교를 세우게 된다. 이렇게 시작
한 도산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두 영웅의 발자취와 아름다
운 동지애가 영원히 남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산과 남강의 독립운동 발자취
는, 오산학교와 대성학교을 통하여 수많은 제자들과 동지들을 배출하였고, 두 영
웅의 동지애는, 후세대가 본받아야 하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그
대원칙을 가르쳐 주었다. 남강만큼 도산의 독립운동방략을 실천한 독립운동가가
드물었다. 남강은 도산보다 14살이 위었으나, 항상 도산을 스승의 자리에 두고,
도산의 신학문을 배우고 실천하였다.

도산과 남강은 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두개의 별이며, 두 영웅의 만남은 한국 민
족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고 사건이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 근대사를 이끌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건국의 지도자들이, 두 사람으로 인하여 배출되었기 때문
이다. 이것이 도산과 남강이 다른 민족의 지도자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일이다. 두
영웅은 수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이다.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대서특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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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과 남강이 한번 맺은 동지애는 독립운동 기간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한
사람은 국내, 한 사람은 해외, 때와 장소는 달랐지만, 그들의 동지애와 불타는 애
국심은 영원히 변하지 않았다. 도산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피체되어 조선의 감
옥에서 고생하다가 풀려나와 전국을 순행하게 되었다. 도산이 평양에 도달하였을
때에, 그는 바로 남강 이승훈의 묘를 찾아, 신민회 이래 평생 동지인 남강 이승훈
묘 옆에 기념 식수를 하고 먼저 간 동지를 극진히 예우하였다.

3. 오산학교

1907년 11월 24일 남강은 사재를 털어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남강은 “생각 즉
행동”이라는 실천이 몸에 베인 사람이었다. “이따가” 혹은 “내일 하지”라는 말은
남강의 생애에 없었다. 도산의 연설을 들은 남강은 즉시 상투를 짤라 버리고, 양
반촌을 만들어 온 집안이 양반이라고 소리를 듣고 폼내고 살려고 기와집을 짓던
공사판을 즉시 중단시키고, 그 기와장을 바로 오산학교를 짓는 데 사용하였다.

삼일운동 당시의 일화는 남강의 크고 결단력있는 일면을 잘 알려준다. 그날 태화
관에 모인 각 종교계 대표들과 지도자들은 누가 민족을 대표하고 누구 이름이 제
일 먼저 나오는가 하고 논란이 벌어졌다. 이 때 남강은 버럭 소리를 질렀는 데,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이렇다. “무슨 소리들 하고 있는 것야! 이게 먼저 죽는 순
서야! 이봐! 손병희! 당신부터 싸인해!”라고 하여, 일시에 그 감투 싸움 문제를 상
투 짜르둣이 풀어 버리고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큰 운동인 삼일운동을 시작하게
하였고, 한민족이 가장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독립운동선언문이 세상에 나
오게끔 하였다. 그는 한국 남자들의 체면을 살려준 사나이 대장부이었다.

오산학교는 바로 남강 이승훈이 한민족에게 준 큰 보물이고 유산이었다. 처음에
7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고, 전체 졸업생이 100여명 남짓하였으나, 한민족의 기
라성같은 인재들이 여기에서 배출되었다. 설립 초기 오산학교 교장을 맡은 고당
조만식 장로는 행사나 모임 때마다 예배를 드리는 등 기독교교육을 실천했다. 이
종성(李鍾聲)·박기선(朴基璿)·류영모(柳永模)·홍명희(洪命熹)·김성환(金星煥)·주기용
(朱基瑢) 같은 이들이 남강의 지도정신 아래 학교를 이끌어 갔다. 교사로는 여준
(呂準)·서진순(徐進淳)·류영모(柳永模)·이택호(李宅鎬)·염상섭(廉尙燮)·김억(金億)·이
상정(李相定)·진연근(陳演根)·이윤재(李允宰)·윤기섭(尹琦燮)·이광수(李光洙)·박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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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基璿)·단재 신채호 등이 교사로 재직하였다. 학교 출신인 중 주요 인물로는 시
인 김소월, 김기석, 순교자 주기철 목사,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화가 이중섭, 교
육자 김기홍, 주기용, 시인 김억, 백석, 의사 백인제 등이 오산학교 출신들이다.
다석 유영모와 씨알 함석헌이 성경을 가르쳤고, 춘원 이광수가 새벽기도를 인도
하기도 했다. 한경직 목사가 누구인가? 그가 송창근, 김재준 목사 등과 같이 한국
목사의 3인방이다. 평생을 겸손하게 사신 분이다. 송창근 단우, 김재준 목사는 현
재의 한신대학교를 세운신 분들이다. 김소월은 한국이 낳은 대표적인 시인이다.

당시의 오산학교의 교장, 교사, 학생들은 하나 같이 민족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전부 남강 이승훈의 직접적인 훈육을 받은 것이다. 도산이 많은 제자를 가진 것
과 아주 흡사하다. 그 많은 오산학교의 인물 중에서도, 목숨까지 바쳐 순교한 주
기철 목사의 생은 처절하기만 하다. 그의 생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1) 주기철 목사
한민족 역사의 한 산맥을 이루고, 독립운동사의 정점이고, 기독교 역사의 으뜸이
된 주기철 목사의 생애는, 우리 한민족의 고난의 가시발 길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무슨 힘이 그를 인간의 몸으로 견딜 수 없는 죽음의 고문 앞에 당당히 서
있게 하였는가? 신앙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주기철의 신
앙 옆에는 바로 오산학교의 정신이 있었다. 바로 남강 이승훈의 교육정신이었다.

2015년도에는 뉴욕한인교회의 역사편찬위원장이었는 데, 이 교회는 삼일운동의
정신을 직접적으로 이어 받아 1921년도에 조병옥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많은 지도자들이 나온 곳이다. 조병옥, 장리욱, 김도연, 김마리
아, 곽림대, 천세헌, 김여제, 임초, 한승인등, 수많은 흥사단 1세 단우들이 활동
한 곳이다. 독립운동 단체만도 17개나 된다. 김마리아의 근화회도 뉴욕한인교회
에서 시작되었다. 도산도 1925년도 경에 이 교회에서 연설을 하신 것 같은 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여기에 주기철 목사의 당조카가 되는 고 주영빈 장로가
다니고 계셨다. 주영빈 장로는 오산학교 주기용 교장의 아들이다. 이분이 도대체
평소 겸손하여 인터뷰같은 것을 사양하였다. 역사적인 기록에 대한 말씀이 없으
셨는 데, 2015년도 경에 주영빈 장로 댁을 방문하여, (쳐들어간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임) 주기철 목사의 부분에 대하여 물어보고 녹음을 하였다. 주영빈 장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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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의 감옥에서 주기철 목사를 면회하였는 데, 이미 고문으로 인하여 주기
철 목사이 손톱이 다 빠진 것을 보았다라고 증언하였다. 주기철이 누구인가? 그
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처절하게 항거하다 순교하여 한국 기독교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는 고문에 의해 죽었지만 다시 그의 정신은 꽃을 피워 한민족의 으뜸
이 되었다. 그가 바로 오산학교 졸업생이다.

도산의 영향으로 남강 이승훈이 7명으로 시작한 오산학교는 다석 유영모, 씨알
함석헌을 거쳐, 이제 7천만 한민족을 아우를 수 있는 위대한 사상과 철학를 낳게
한 산실이 되었다. 36년 일제의 고통 속에서 도산사상과 씨알사상이 잉태되어, 그
극심한 독립운동이라는 산고 속에서 위대한 한민족의 사상이 태어난 것이다.
남강 이승훈의 말대로 “70명 700명을 넘어” 이제 7000만 한민족을 호흡할 수
있는 사상으로 태어난 것이다. 주기철 목사의 예를 들었으니, 도산의 제자 중에서
유석 조병옥의 예를 들어 보자. 얼마나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이 중요한지.

2) 조병옥
떠꺼머리 총각 조병옥은, 나라를 잃어 버렸는 데 나라를 찾을 길이 어디 있는가
를 고민하였다. 그 방법을 찾기 위하여, 그 방법을 알고 있다는 지도자들을 찾아
갔다. 하와이로 이승만을 찾아가서 물어 보니, 이승만은 외교로 독립운동을 하고
나라를 찾아야한다는 것이다. 소위 외교독립론을 들은 것이다. 박용만을 찾아 가
보니, 국민이 무장하여 전쟁으로 일본을 무찔러야 겠다는 것이다. 소위 무장투쟁
론을 들은 것이다. 하와이에서 노동 일을 마친 조병옥은 캘리포니아로 이동하여
노동 일을 하고 있었다. 도산이 같은 주 CA에 있는 것을 알고, 유석은 도산에게
편지를 썼다. 당시 도산은 리버사이드 파차파 켐프에 있었을 것이다. 역사적인 그
편지가 있으면 좋겠는 데, 지금은 그 편지를 찾을 수가 없다. 조병옥의 애국충정
의 편지를 받은 도산은 조병옥이 보통 청년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여, 직접 조병
옥을 찾아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날이 새도록 대화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왜 흥사단이어야 하는지 이야기 하였다. 삼일동안 대화
를 지속하였다. 도산의 조병옥에 대한 삼고초려인 것이다. 조병옥은 이 때 도산에
게 완전히 사로 잡히게 되었다. 도산의 진실성, 이지성, 애인성에다, 도산의 그 따
뜻한 배려와 지극정성의 경청이 아마 조병옥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이후 콜럼비
아 대학교에서 신문장사 등의 고학으로 학위를 마친 유석은 1925년도에 귀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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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다. 유석이 1925년도 부터 1945년 일제 치하에서 온전히 생활을 했을리가
없다. 그를 포섭할려는 일제의 마수와 가난의 연속이 유석을 흔들리게 하였다. 유
석은 집에 들어가면 잡히니, 밖에서 돌고 다방을 전전하였다. 조병옥의 아내 노정
면 여사는 아이를 낳았는 데, 가난하여 젖이 말라 버렸다. 어린 새끼를 살리기 위
하여, 변 여사는 동냥 젖을 얻기 위하여 동네 어귀를 헤메고 다녔다. 심청전에 나
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덩치가 큰 유석은 배가 고팠다. 배고플 때 찾아간 사람
이 바로 한승인 단우이다. 도산의 비서를 지낸 한승인 단우는 당시에 화신에 근
무하였는 데, 짜장면 한 그릇은 살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한승인은 조병옥이 찾
아오면 뒷골목 짜장면 집에 데려가 배불리 먹였다. 아마 짜장면 곱배기를 시켰을
것이다. 한승인 단우가 조병옥의 백절불굴, 곧은 절개를 지킨 고백을 증언하였다.
“내가 마신 쓴 잔은 도산의 교훈이 아니었더면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유석 조병옥은, 그 긴 일제의 치하에서 자기가 변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힘
이 바로 도산이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한승인 단우는 조병옥의 뒤에는, 가난을 탓
하지 않고 내조한 노정면 여사를 높이 샀고, 현모양처의 길을 걸었다고 두고두고
칭찬하고 이야기 하였다.

조만식, 여운형, 장덕수, 장리욱, 김구, 차리석, 송종익, 김마리아, 피천득, 이갑,
한승인 등 수 많은 독립운동가, 혹은 제자들의 도산과의 만남도 조병옥과 비슷하
다. 도산이 직접 입단시킨 120-130 명의 단우들 거의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의 길
을 걷고 건국의 밀알들이 되었다. 도산/남강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
들을 겸손하게 낮추어, 마치 바다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물들을 자신들의 품안
으로 모이게 하고, 자신들을 높이어 자랑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였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것이다. 오산학교는 바로 씨알사상이 잉태된 성스러운 장소가
된 것이다. 씨알사상은 바로 남강의 제자들이 남강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룩한 사
상이다. 도산사상도 마찬가지이다. 도산의 제자들이 도산의 정신을 받아 이룩한
것이 바로 도산사상이다.

도산/남강의 교육 사상과 그의 실천적인 삶들은 현재 이 시간도 우리 개인과, 흥
사단과 민족을 향해 태양같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렇다. 꺼지지 않는 태양같이
빛을 발하고 있다. 도산/남강의 1) 교육 진흥사상, 2) 기독교 교육사상, 3) 실천교
육 사상, 4) 산업교육 사상, 5) 평생 교육 사상은 현 시대의 교육의 본질이고, 도
산/남강, 이 두분의 사상적 근원이고 기준이다.

1 Comments
admin 2018.06.13 06:58  
거수!

한민족에 있어서 교육은 무엇인가?

16번째 동맹독서를 보내면서 마지막 회라고 하였으나, 도산사상을 공부하면서 자꾸 떠오르는 인물이 남강 이승훈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씨알사상을 연결해주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남강은 충분히 청자연적의 파괴처럼, 우리의 동맹독서에 모실 자격이 있는 어른이십니다. 장리욱 총장님 책이지만, 독립운동의 큰 인물이자 도산의 동지인 남강 이승훈을 17번째 동맹독서에 모셨습니다.

남강은 도산의 영향으로 오산학교를 세우고, 오산학교는 수많은 기라성같은 인물을 배출해 내었습니다. 약 100여명 밖에 안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지만, 이들은 건국의 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도산이 배출한 인물들도 독립운동이나 건국의 지도자가 많았다는 것이, 남강과 유사합니다. 독립운동사에서 대서특필할 일입니다. 오산학교와 대성학교 출신이 많았습니다. 대성학교는 도산이 망명하자, 곧 학교가 문을 닫았지만, 오산학교는 패쇄되고 또 열리고 하였습니다. 남강 이승훈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산학교 출신의 주기철 목사의 생애가 계속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일제의 그 무시무시한 고문을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이겨 내었는가? 오산학교 정신이 있었구나!

윤창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