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노예 배상은 체제를 바꾸는 일 [차만재, LA흥사단]
지난 7월 23일 차만재 단우께서 프레스노 비 신문사에 기고한 글을 김태수 단우께서 번역한 글입니다.
http://www.ykausa.org/bbs/board.php?bo_table=Freeboard&wr_id=669
흑인 노예 배상은 체제를 바꾸는 일*
이번의 팬데믹 기간 동안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야기된 인종차별 시위가 과거 유사한 시위와 다른 점은 모든 사회층과 인종들이 체제적이고, 구조적인, 전환적 경찰 및 사회 불평등을 요구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모든 시위자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는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이를 실행해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과거 미국의 흑인 노예 후손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배상하는 성격의 배상금 지급이 바로 그 점이다. 이러한 제안은 과거에도 많이 논의되고, 토론, 실행을 하려했던 적이 있지만, 아직도 현재 그대로인 상태이다. 미국의 인종 차별과 불평등의 기저에는 경제적인 면이 자리잡고 있다. 즉, 빈곤과 이에 따른 결과를 말한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정신에 입각하여 흑인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은 어떨까?
과연 흑인들은 이 배상금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물론이다! 미국 자본주의는 노예제도를 등에 업고 성장하고 개발되어 왔다. 이러한 노예들의 고통과 결과적 영향을 배상하는 것이 과연 나쁜 일인가?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에 나섰던 앤드류 양이 주장한 대로 모든 흑인들에게 매달 $1천 달러씩 아무런 조건없이 준다고 가정해보자. 이미 웰페어 지급으로 실시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기본 수입 지급은 웰페어하고는 다르다. 웰페어와 비교해서, 관료주의적인 성가심도 없고, 금액도 적지 않고, 조건도 없고, 꽤 괜찮은 액수이다. 이 배상금의 수령자에게 존엄성을 주고, 또한 경제적 안정성, 자유도 준다. 경제학적 논리를 보더래도 수익이 늘게되면 저축율도 늘게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적 경제적 혜택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 우려로 이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일도 안하고 빈둥빈둥거리고 사회적 병폐를 낳게된다면? 일을 찾는 것을 막고 일도 안하면서 놀고 먹게만 된다면?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배상금을 어떻게 준비하여 지급할 것인가?
1960년대와 70년대에, 이러한 기본 수입제도를 뉴저지, 펜실배니아, 아이오와, 노스 캐롤라이나, 게리 인디아나, 시애틀, 덴버에서 시험한 적이 있었다. 공공 지원금을 받을 자격이 있는 한 그룹의 시민들에게 기본 수입이 지급되었고, 또 하나의 그룹에게는 지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이 어떠한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관찰하였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을 관찰한 결과 이들이 직업을 구하려는 비율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 기본 수입을 받은 그룹에서 가장 뚜렷한 변화는 이들의 주택 거주 기준과 주택 소유율이 향상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번 팬데믹 동안, 한국의 지방자치기구에서는 유사한 지역적 기본 수입제를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기본 수입을 받는 젊은 층들이 일자리를 찾으려는 비율이 크게 올라갔다. 그 이유는 이들이 임대료를 내야하는 압박감이 크게 해소되었고 다른 기본적 문제가 많이 해결되었다는 점에 기인했다. 이들은 기본 수입을 받아 힘이 복돋아났고 힘차게 일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배상금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냐는 점에 대해서는, 과거 노예 노동으로 혜택을 받은 이들에게 추가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대한 보상, 윤리적 행동이라고 보면 된다. 부패, 정치, 소홀한 감독, 의도하지 않았고, 대부분 원치 않는 결과는 사회적 정책의 도입을 따르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결과는 모든 정책 실행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바로 사회적 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비용의 영향이 의도한 혜택보다 많지 않으면, 정책 프로그램은 계속되어야 하고 실행되면서 계속 향상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이러한 대규모로 실시되는 과거 흑인 노예 배상은 윤리적 계율에 기반을 둔 정당한 정책이다. 배상금 지불의 영향은 체제를 바꾸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차만재 박사, 칼 스테이트 프레스노 대학 정치학 은퇴교수. *이 글은 2020년 7월 23일자 프레스노 비 신문 사설란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