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의 대공주의를 다시 생각한다’에 대한 의견 [이석희 단우]
※ 설명_흥사단 기러기 2020년 7_8월호(통권 553호)에 실린 이창기 단우의 ‘도산의 대공주의를 다시 생각한다’에 대한 이석희 단우의 원고를 기재합니다.
‘도산의 대공주의를 다시 생각한다’에 대한 의견
이석희 단우
지난 기러기 2020년 7-8월호(통권 553호)에 실린 이창기 단우의 ‘도산의 대공주의를 다시 생각한다’는 도산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대공주의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에 관해 단내에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그동안 도산사상의 이론적 고찰에 깊이 천착해온 그의 학자적 연찬을 반추할 때 더욱 그러하다. 지난 2016년부터 동료들과 함께 <대공주의연구모임>에 참여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몇 가지 쟁점에 관하여 단우들과 함께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아래와 같이 논의하고자 한다.
1. 쟁점제기와 관련하여
이창기 단우는 발표문에서 대공주의에 관한 2가지 쟁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도산의 대공주의에 대한 연구자들의 논의는 내용면에서 크게 두가지 쟁점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대공주의를 1920년대 독립운동 노선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민족대통합을 이루기 위해 소아적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대국적 견지에서 함께 힘을 합하자는 애국적 통합정신 혹은 대동단결론으로 보는 견해이고, 둘째는 대공주의를 확대 해석하여 독립운동의 방략뿐만 아니라 독립후의 국가건설 구상, 더 나아가서는 국제사회를 향한 외교적 방침까지를 아우르는 도산의 종합적 경세론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그러면서 대공주의를 대동단결론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종합적 경세론으로 해석하는 견해에 대한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종합적’이라고 하는 용어는 다른 사람의 글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대공주의 연구자들의 글을 관찰해 볼 때 그런 경향(종합적)이 있음을 언급한 것이라고 (구두로) 확인하였으므로 이에 대해서 더 논의하지는 않는다. ‘도산이 어느 자리에서도 대공주의를 자신의 경세론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언급한 바가 없다’라고 하는 것에 논자도 동의한다. 그리고 그동안 대공주의 연구팀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대공주의를 도산의 ‘종합적’ 경세론으로 언급한 경우도 없다.
2. 대공주의를 ‘대동단결론’으로 해석하는 것과 관련하여
이창기 단우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하고 있다.
‘도산은 특별한 의미를 담은 용어에 대해서는 반드시 쉬운 말로 그 의미를 명쾌하게 규정하고 사용한다. 그런데도 대공주의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진술한 바가 없다. 다만 대통합을 외치는 그의 언설과 행적으로 후학들이 ‘대공주의’라 명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공주의를 무리하게 경세론으로 확대해서 해석하기 보다는 ‘소아를 버리고 대공을 위해 헌신하자’는 대동단결론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사실에 부합할 것이라고 보인다.‘
위와 같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1)도산이 대공주의에 관해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진술한 바가 없다’라고 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홍언의 편지문에서 도산이 대공주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다만 대통합을 외치는 그의 언설과 행적으로 후학들이 ‘대공주의’라고 명명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어떤 자료에서 어떤 후학들이 도산의 대통합을 외치는 언설과 행적으로 대공주의라고 명명한 바가 있던가? 3) ‘그러므로 대공주의를 무리하게 경세론으로 확대해서 해석하기 보다는 ‘소아를 버리고 대공을 위해 헌신하자’는 대동단결론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사실에 부합할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도산이 통합과 통일을 강조하며 한국인의 대동단결을 주창한 것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일관되게 강조한 것이지만, 특별히 대공주의를 주창한 것은 1927년경 부터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도산이 ‘대공주의’라고 하는 독창적인 개념을 만들어 주장한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서였다. 그것은 대독립당의 건설을 위해서였다. 대동단결을 위해서 대공주의를 주창한 것은 아니었다. 홍언에게 보내는 편지문에 그렇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3. 도산 편지문의 해석과 관련하여
이창기 단우는 나아가 홍언 단우에게 보내는 도산의 편지글에 대한 해석이 ‘매우 자의적으로 부적절하다고’도 하면서 다음과 같이 편지글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아래는 도산의 편지문이다.
(전략) 혁명이론 기본원칙에 있어서는 ①우리는 피압박 민족인 동시에 피압박 계급이므로 민족적 해방과 계급적 해방을 아울러 얻기 위하여 싸우자. 싸움의 대상은 오직 일본제국주의임을 인식할 것 ②우리의 일체 압박을 해방하기 위하여 싸우는 수단은 대중의 소극적 반항과 특별한 조직으로 적극적 폭력파괴를 중심으로 하여 선전 조직 훈련 등을 실행하며 실제 투쟁을 간단없이 할 것 ③일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된 뒤에 신국가를 건설함에는 경제와 정치와 교육을 아울러 평등하게 하는 기본원칙으로서 민주주의국가를 실현할 것 ④일보를 더 나아가 전 세계 인류에 대공주의를 실현할 것 (후략)
이창기 단우는 ‘이 네 가지 원칙은 각각 독립성을 갖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경세론자들은 네 번째 원칙 속에 언급된 대공주의라는 용어를 보고 대공주의를 네 가지 원칙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대해석한 것이다. 매우 자의적이고 아전인수적인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네 가지 원칙 모두를 대공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하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 동의한다. 그가 언급한 바와 같이 ①은 투쟁의 대상이고 ②는 투쟁방법을 언급한 것으로서 이것은 앞에서 제시하는 통일대당의 혁명이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③과 ④는 대공주의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즉 ④에서 ‘일보를 더 나아가’라고 언급한 것을 볼 때, 앞의 ③에서 언급한 ‘일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된 뒤에 신국가를 건설함에는 경제와 정치와 교육을 아울러 평등하게 하는 기본원칙으로서 민주주의 국가를 실현시킬 것’과 함께 대공주의의 내용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야 완전한 해석이 된다. 그런데 ④에서 제시한 대공주의가 ③에서 제시한 3평등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해석하다면 ④의 접속문장 ‘일보를 더 나아가’하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 것인지? 따라서 ③과 ④를 함께 묶어서 대공주의의 내용으로 규정하여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그 후 1930년 1월에 도산의 주도하에 창립된 <한국독립당> 당의당강에 4평등(균등)으로 나타났고, 1938년 4월 15일 개최된 도산 추도대회에서 보고된 『韓國革命領袖 安昌浩先生 40年革命奮鬪史略』(차리석 선생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도산회보』 1993.5,6.-9.10. 박만규 해제) ‘제2 先生之革命方略’에서는 ‘선생은 … 한국의 영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한 후, 급속히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을 기초로 하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하시었다. 네가지 평등 가운데 하나만 빠져도 원만한 해결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하였고, 도산 사후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에서는 4평등이 ‘3균제도’로 나타났음을 상기할 때, 도산의 대공주의는 4평등을 골자로 하여 독립 이후의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경세론이었다고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창기 단우는 ④에서 ‘전 세계 인류에게 대공주의를 실현하게 한다는 것은 대공주의를 원래의 의미에 맞추어 자국의 이익(소아)에 집착하지 말고 각 나라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인정하고 보호하여 세계평화와 인류공영(대공)의 실현에 기여하자는 선언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한다’라고 하였다. 이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대공주의를 ‘원래의 의미에 맞추어’ 해석한다고 하면서, 대공주의를 ‘각 나라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인정하고 보호하여 세계평화와 인류공영(대공)의 실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앞에서 전제한 ‘원래의 의미’ 즉 ‘대동단결론’과 다른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러면서 ④를 해석하면서 ‘… 각 나라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보호하여 세계평화와 인류공영(대공)의 실현’이라고 한 것은 대공주의 한 요소인 ‘민족평등’에 부합되는 설명이다. ④를 이렇게 민족평등으로 해석한다면, ③에서 제시한 3평등(경제, 정치, 교육을 아울러 평등하게 하는)과 더불어 4평등을 제시하는 것이 되므로 대공주의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대공주의는 4평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앞에서 인용한 도산 편지문의 내용은 대독립당(혹은 독립대당)을 구축하기 위하여 혁명이론의 기본원칙으로 제시된 것이다. 당을 조직함에 기본적 요구가 셋인데, 1은 핵심이 될 만한 기본동지, 2는 민중이 신앙할 만한 기본이론, 3은 조직운동비에 충당할만한 금전이라고 하였다. 2민중이 신앙할만한 기본이론(기본원칙)은 독립대당을 결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시된 것이었다. 도산은 1930년 민족계열만으로 <한국독립당>을 결성한 바 있지만, 1931년 홍언에게 보내는 편지문에서는 여전히 독립대당의 결성을 역설한 것으로 볼 때, 대독립당에 대한 그의 염원과 비전이 얼마나 지극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도산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방략에서 독립대당의 결성을 추구하였고, 독립이후의 민주국가의 건설을 위하여 대공주의를 주창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공주의는 독립대당을 결성하기 위한 기본원칙인 동시에 독립이후 민주국가 건설의 청사진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도산이 피체되기 이전에 제시된 최종적인 경륜이라고 할 것이다.
4. 결론과 관련하여
이창기 단우가 결론적으로 정리하면서, 온 국민이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한 나라의 미래를 건설하는 구상을 경세론이라고 한다면 도산의 경세론은 효과적인 독립운동 방략, 민성혁신론, 민주공화국 건설 구상 등이 모두 포함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 공감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도산의 경세론을 대공주의라는 개념 속에 가두는 것은 도산의 사상적 위상을 드높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위축시키고 궁색하게 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염려된다’라고 하는 결론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한다.
도산은 독립협회 활동에서부터 신민회시절부터 민성혁신, 민주공화국 건설, 대동단결을 추구하였고, 1919년 9월 상해임시정부의 통합에 기여함으로써 그의 민주공화국 건설론이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의 분열 이후 국민대표대회 등을 통한 임시정부의 개혁을 추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1926년 상해로 가서 좌우파가 연합하여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에서 대독립당을 건설하고자 기본이론으로써 대공주의 사상을 주창하였던 것이다.
손문의 三民主義(民族, 民權, 民生)가 중화민국을 건설하기 위한 사상적 표현이었다면 도산의 대공주의는 독립된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이에서 더 나아가 각 나라가 자주성을 가지고 독립성을 보호하여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의 실현하기 위한 사상으로 대공주의를 주창하였던 것이다. 도산의 대공주의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인류공영에 기여하고자 하는 사상적 외연을 갖는 것이므로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다.
도산이 일제 강점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절차탁마하는 생애속에서 대공주의 사상을 제시한 것을 생각하면서,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학들은 도산의 대공주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분골쇄신하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공적 논의의 계기를 열어주신 이창기 단우께 깊이 감사드린다. 앞으로 대공주에 관련한 1차 자료의 발굴과 연구가 확대되어 도산의 대공주의가 넓게 공론화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