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Committee (독립운동사연구소)

【45-86 흥사단사 명장면 40선】제17회, 미주위원부의 원조와 송종익장학부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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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위원부의 원조와 송종익장학부 설립

 

 

전후의 원조와 구호활동 지원

 

미주위원부 단우들은 본부를 국내로 이전할 때와 6.25한국전쟁으로 국내가 어려울 때, 흥사단 운영자금의 원조와 구호활동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전란으로 인한 본부의 재건을 위하여 1954년 1월부터 1955년 5월까지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이국 생활의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따뜻한 동지애와 애단정신, 애국심을 발휘했던 것이다. 1954년 9월 1일 자로 한시대(1200달러) 등 41인의 단우들이 3,702달러를 모금하여 본부로 성금을 보내 왔다.

 

이밖에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단우도 적지 않았다. 이때의 사정은 당시 미주위원부의 모금을 주선했던 하희옥의 증언으로 더욱 생생하게 알 수 있다. 그는 도산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 출신으로 1917년 미국에서 입단한 후 오직 흥사단 정신으로 일생을 살았다. 또 1950년부터 1963년 10월경까지 미주위원부에서 서무원의 책임을 맡아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1948년 본부가 국내로 이전한 후 미주위원부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국내에 지원한 사실을 하희옥의 증언에 따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기러기』, 1974. 1·2 합병호)

 

(중략)

3. 김재순을 통해 국내의 실정을 듣고 미주위원부에서 3년 동안이나 동지 구제금을 모금하여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으며, 김재순은 귀국 시 구제품 의복을 8배일(Bale)이나 작봉해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 피난 동지들에게 분배했다.

4. 1953년 장리욱의 서신을 통해 국내 본부에서 잡지를 출간하면 미주위원부에서 매월 250불을 책임져 줄 것을 부탁 받고 송종익 100불, 한시대 부부 80불, 등 단우 심방을 통해 모든 단우들의 성의를 모아 매월 400불을 모금할 수가 있었다. 이것을 계속 수봉하여 월 250불을 4년 동안이나 『새벽』 잡지의 기금으로 장리욱을 통해 송금했다.

5. 대성빌딩 집회실에 의자 350개가 필요하다는 장리욱의 서신을 받고 변기현의 유산 1천 300불을 위원회 결정에 의해 본부에 송금했다. 그 후에 집회실에 사용할 피아노구입비 150여 불을 모아서 중고 피아노를 구입하여 본부로 보냈다.

 

송종익장학부 설립

 

미주위원부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장학금을 마련하여 젊은 인재를 양성했다, 1955년에는 종전 300불의 장학금을 500불로 증액하고 미국 죤스홉킨스대학의 리영근(이광수의 아들)과 카네기테크대학의 주동일(주요한의 아들)에게 지급했다. 그리고 1956년에도 본국에서 연희대학교(연세대학교) 물리학과에 재학 중 유학을 간 백영중에게 ‘흥사단장학금’을 지급하였다. 당시 그에게 (중략) 재정보증을 서준 사람은 송종익이었다. 백영중이 1956년 1월 5일 도미하여 LA에 도착하던 날 공교롭게도 그의 재정적 후원자인 송종익이 별세했다. 백영중은 3월 중순 오레곤 주립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한 후 1959년 5월 인디애나공대 토목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토목기사의 길을 걸어 대성하였다.

 

한편 우강(友江) 송종익(宋鍾翊)의 유족이 1957년 6월 10일 유산 중 1만 5천 불을 정식 기증한 것을 계기로 장학사업을 보다 체계적이고 규모 있게 전개하게 되었다. 송종익은 1887년 2월 27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송인구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고 부산, 서울, 일본의 코오베 등지에서 활판술과 약학을 공부했다. 서울에서 박영효가 추진하는 혁명운동의 연락책을 맡기도 하였다. 1908년 미국에 건너가 국민회에서 일을 하며 이 무렵 스티븐스를 암살한 장인환, 전명운 재판후원회의 재무로서 경비 조달에 힘썼다. 1911~1912년 경 도산을 처음 만나 그의 경륜과 인격에 감화를 큰 받고 희생과 봉사의 태도로 도산을 도왔다.

 

1913년 흥사단 창립 때 8도 대표의 경상도 대표로 흥사단 창립에 참여하여 10년간 단소 2층에서 자취하며 단의 재정 및 동맹저축의 책임자로서, 또 북미실업주식회사의 경리, 보관, 기록 등의 사무를 보았다. 그는 일찍이 부기법을 익혀 현대적이고 합리적으로 금전 관리를 하였다. 도산이 미국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1914년 하와이 방문 때나 1917년 멕시코와 쿠바의 방문할 때도 재정적인 뒷받침을 하였다. 1919년 이후 도산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에도 그는 국민회의 재무원으로서 경비 조달에 힘썼다. 1921년부터는 미주 본부의 이사부장으로서 단의 지도자가 되었고 도산 가족들의 생활을 돌보았다.

 

1923년에는 김영도 여사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소규모의 식료품점을 경영하여 다소의 재산을 모았는데 이는 그가 이재에 밝고 성실과 친절, 검소함은 물론 철저한 금전 관리 능력 때문이었다. 송종익은 1941년 하와이에서 개최된 한족대회에 미주 대표로 참가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결성을 도왔으며, 1945년까지 이 위원회 집행부의 재무로 일했다. 해방 되던 1945년 11월 재미한족연합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하여 약 10개월간을 활동하다가 다시 도미했다. 그리고 남은 열정을 국민회와 흥사단운동 등 민족운동에 쏟아 부으며 모아 둔 재산을 다 바치고 1956년 1월 7일 69세로 별세했다.(중략)

 

송종익이 별세한 이듬해인 1957년 6월 1일 그의 아들 윌리와 딸 매리는 선친의 뜻을 받들어 유산 중에서 1만 5천 불을 희사하여 장학기금을 설립하고 그 운영과 관리를 흥사단 미주위원부에 위임했다. 신탁증서의 요지는, “1957년 6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주 법에 의한 비영리 법인 흥사단에 1만 5천 불을 기부하며, 흥사단은 이 금액을 수취하여 이 자금과 그것에서 생기는 일체의 수입을 장학금에 쓰도록 하기 위하여 영구히 신탁 보관한다. 이 기부금의 원리금은 저당하거나 다른 채무에 충당하거나 하는 일이 절대로 없다는 조건의 합의 하에 기부한다”는 것이었다.

 

장학금 수혜자는 흥사단본부 이사부에서 선발하였으나 단우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선발된 사람에게는 년간 1인당 600 달러가 지급되었다. 그 자격은 대한민국 국민인 자로서 인격이 고상하고 미국의 대학원에서 공학, 물리학, 화학, 농학을 전공하는 자여야 했다. 그리고 누구나 1회 이상의 장학금을 받을 수 없으며 연구를 마친 뒤에는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명시했다.

 

1963년에 흥사단은 송종익장학부를 ‘송종익장학회’로 개칭하고 규정을 대폭 개정했다. 개정 내용은 선발 대상자는 기술 또는 자연과학계통의 대학 또는 대학원 과정을 전공할 남녀 학생으로 한정하고, 미주까지 가는 여비만을 지급하되, 미주에 도착한 뒤에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학업을 완료할 결심을 가진 흥사단 단우로 제한했다. 또 도미 후에는 전공과목을 수업하면서 인격향상에 노력하고 또 장래 흥사단의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미국의 청소년운동이나 봉사단체 운동에 관한 연구를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렇게 개정된 규정에 따라 1964년 8월 27일 제1차 장학생으로 김승공이 선발되었다. 그는 1962년 연세대학교 화공과를 수료하고 군 복무 중 문교부에서 실시한 해외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하였으며 도미 후 남가주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송종익장학생으로 연세대 화공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철수가 1965년 4월 2일 도미 유학의 길에 올랐으며, 서울공대 광산과를 졸업한 이장훈이 1966년 7월 4일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버클리 공과대학 토목과에 유학하였고, 같은 해 8월 16일에는 김향자(서울대 약대)가 필라델피아 템플대학에 입학하여 영양화학을 전공하였다.

 

 

◎ 자료출처 : 『흥사단100년사』. 2013. pp.335-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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