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성 변호사의 강론 내용(2019년 11월 OC흥사단 월례회)
서동성변호사님은 한인사회에 유일한 신문이었던 [신한민보]의 영문판 주필로 3년간 봉사하셨다.
정일권 전국무총리가 주미대사로 부임했을 때는, 한인사회의 언론인으로서 초청받아 참석하셨다.
미주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과의 연관성과 역활 등에 깊은 이해를 가지신 분이시다.
유물은 오랜시간 천장 다락방에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으로,수많은 논의끝에 복원작업을 위해 USC를 거쳐,
지난해 11월에는 한국정부의 도움으로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내줬다.
LA에 영구히 보존할 수있는 수장고가 준비되면,다시 오게 된단다. 보존 유지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증언들은 차츰 흐려지고, 증인들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이창수 OC 흥사단 지부장]
아래는 2019년 11월 26일(목) 서동성 변호사님을 모신 11월 월례회 강론 내용입니다.
강론 제목: '흥사단, 국민회 그리고 우리의 보물'
*첨부된 워드 파일을 다운하면 강론 내용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흥사단, 국민회 그리고 우리의 보물
서동성 변호사
요즈음은 감사의 계절입니다. 저는 감사할 일이 유난히 많은 사람입니다.
오늘은 특히 저를 불러주셔서 여러분을 만나 뵐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심에 감사하고 그 덕으로 제가 아끼는 고등학교, 대학교 후배인 마서준 회장을 비롯 몇몇 정겨운
얼굴을 오랫만에 대하는 기쁨을 안겨 주심에 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에게 주신 숙제의 제목이 무엇이냐 하길래 얼떨결에 “흥사단의 보물, 국민회 보물, 그리고 우리의 보물” 이라 엉성하게 대답했더니 이창수 지부장이 대뜸 “흥사단, 국민회 그리고 우리의 보물” 이라고 깔끔하게 다듬어 주시더라구요. 우리 한국에서도 그런지 몰라도 이곳 미국의 대소 신문사에서는 어떤 기사라도 기자가 쓰면 그 초고가 반듯이 “Copy Desk”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copy editor가 기사를 일단 fact check와 철자법, 문법 등 오류가 없나를 점검한 다음에 모든 기사에 제목 (title)을 다는데 제목이 얼마나 잘 붙혀졌는지에 따라 독자들이 기자가 쓴 그 기사를 읽느냐 마느냐가 결정됩니다. 때문에 copy editor가 제목을 어떻게 다는냐에 따라 그 글이 읽혀지느냐 마느냐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이 지부장이 과거에 신문사에서 copy editor 노릇을 하였는지 몰라도 오늘 여기에 오신분 중에 혹시 오늘의 강론제목에 이끌려 오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사흘 전, 그러니까 11월 22일 금요일에 이 보물들이 서울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예기하고 있는 이 보물이 도대채 무엇을 말하는가를 우선 말씀드려야 겠네요.
지금으로 부터 16년 전, 2003년 3월 달 엔가 지금 남가주의 Koreatown 의 발상지인
Jefferson가에 현재까지 보전되어온 대한인국민회관을 오랫만에 보수 하였는데 그 작업 도중에 다락방에서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모두 인쇄물을 포함한 역사적 유물 약 20000점이었습니다.
여기에는 1900년대 초기부터 1970년대 까지 우리 이민 선조들에 의하여 사용된 태극기, 신문, 독립자금 입금장, 재미동포 인구조사 기록, 한글학교에서 쓰여진 교과서, 개인 서신, 사진 등 귀중한 사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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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우리 이민선조들의 삶, 특히 당시에 일어나고있던 독립운동의 산 역사를 포함한 그들 나날의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다른데서 찾을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래도 1905년 창간되어 1970년 후반 까지 발간되어온 미주 교포신문 신한민보였고 그 주간지는 하와이를 포함한 미주전역 뿐만 아니라 멀리 중국, 원동의 브라디보스톡, 유럽을 망라한 해외 교포사회까지 뿌려졌던 유일한 보도 매쳬였습니다. 대한인국민회에 의하여 발간된 이 신문에 실린 기사 가운데 에는 특히 상해 임시정부 독립자금 모금 통로 및 액수 등이 상세히 적힌 기록, 해외에서 보내 온 서신 등 현재 까지도 정확히 거론되지 않았던 당시 미주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가 듬뿍 담겨져 있습니다. 이 새로운 자료가 널리 알려지면 한국 독립역사의 새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하는 역사학자가 점점 생겨나고 따라서 미주이민과 독립운동에 관한 교과서 까지도 다시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늘어나기 시작할 만큼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자료들이 근세 한국역사 서술에 중요한 무게를 차지한다는 것을 당시에는 잘 모르고 있었고 오로지 모국에 있는 몇몇 역사학자, 그 중에서도 미주 독립운동사를 중점으로 연구하고 있던 소수의 학자들만 발견된 유물이 보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이 보물을 탐내기 시작하였고 꾸준하게 이 유물을 모국으로, 특히 천안에 있는 둑립기념관 (이하 “기념관”)에 유치하도록 가진 애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기념관의 소수 학자가 이곳을 들락거리면서 당시 자료들을 보관해오던 나성장로교회와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하 “기념재단”) 관계자 몇명을 설득하여 약간의 자료를 옮기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공개적으로 모든 자료를 몽땅 기념관으로 이관시키도록 적극적인 캠페인을 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미주 독립운동의 역사적 유물은 반듯이 조국으로 보내저야 한다는 주장을